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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일 무역적자는 나쁜 것인가
    World economy 2019. 7. 19. 09:55

     

    2000 년대 초반까지 신문에 매년 나오는 보도 중 하나가 늘어가는 대일 무역적자에 관한 기사였다. 이러한 산업의 일본 의존도는 우리 경제의 심각한 위험요인으로 받아들여졌고, 당시 대학생이던 나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컴퓨터 부속품을 사면서 일부러 일본산이 아닌 제품을 사고서 친구에게 ‘대일 무역적자를 줄여야지 ….’ 라고 말했던 기억도 있다. (쓸때없이 매사에 진지했던 학생이었던것 같구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언론에서 대일 무역적자 관련 보도가 많이 줄었고 비중 있게 다루어 지지도 않았다. 실제 적자폭이 줄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던 2007년, 전역하고 학교로 돌아와서 통상 관련 공직에 계시다 학교에 처음 부임한 교수님의 수업을 들었다. 놀랍게도 그 분은 대일 무역적자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국제적 분업 체계의 일부일 뿐이지 우리는 일본서 들여오는 부품과 소재로 완성품을 만들어 국제 시장에 팔거나 중간재를 만들어 중국에 팔아 이익을 보고 있으니 손해 볼 게 없다는 말씀.

     

    교수님 말씀의 핵심은 근본적으로 무역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역이란 단순히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바꾸면서 상대방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거래가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가 잘 하는 것에 집중한 뒤 만들어 낸 결과물을 거래하여 양측 모두가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거래이다. (결과물은 상품에서 부터 서비스와 기술 등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함) 사람도 각자에게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안에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그 외에는 다른 사람이 만든 제품을 사거나 서비스를 돈 주고 이용하는 것과 같이 한 국가도 한정된 자원을 가장 큰 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여러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자 시도한다 해도 그 시도 모두가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우리 나라 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은 일본산 부품과 소재를 수입해 쓰며 완성품을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동안 부품 국산화를 이루어 내지 못했는가 하는 비난이 많지만, 속도가 중요한 기술 경쟁에서 부품의 국산화 비율을 고려하며 기술 경쟁을 벌였다면 경쟁에서 뒤쳐지는 결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적절한 투자로 증산 경쟁에서 승리하며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만약 소재 기술 국산화라는 또 하나의 불확실한 요소에 투자했다면 그 분야에서는 성과가 나더라도 증산 등 다른 경쟁에서는 뒤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일본은 같은 시기 일어난 여러 고민들과 선택의 결과 (일부는 선택했을 것이고 일부는 의도대로 되지 않은 결과이겠지만) 반도체 소재와 부품 산업에서 더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국가적으로는 한국과 일본 모두 메모리 반도체 생산 밸류 체인에서 이익을 보는 구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반도체 이외의 모든 분야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우리는 이렇게 일본에 적자를 보는 대신 전체 무역수지는 물론 원유와 같은 자원을 수입하는 국가들을 제외하고 많은 나라들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대일 무역적자가 나쁘고 굴욕적인 일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게 나쁜 짓을 하며 굴욕을 안기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국제 무역으로 경제를 일으킨 나라로서 특정 국가에 대한 무역적자가 일방적으로 나쁘다는 이야기는 옳지 않으며, 대일 무역적자에 대한 보도가 줄어든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국가 간의 교역이 아무런 장벽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경우를 전제로 한다. 과연 지금의 세상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오늘날처럼 세계화가 진전되고 모든 산업의 공급망이 글로벌하게 짜여진 세상에서도 정치적인 이유나 국가적 자존심 같은 감정적인 이유로 교역을 막아버리는 일들이 있었다. 러시아가 서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잠궈버리거나 중국이 한국에 관광객을 보내지 않는 일이 최근 일이다.

     

    그러나 저런 일들은 러시아나 중국처럼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가 더디고 독재정권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반면 일본은 오랜 기간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유지한 산업 대국으로 국제 무역으로 큰 이익을 보는 나라이다. 거기에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로 무역 질서를 흔들며 자국 국민들이 피해가 보는 일을 일부러 만든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돈을 벌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지난 수십년간 한국과 일본인들이 감정적으로 먼 거리를 유지해도 경제적으로는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습니다. 2019년 7월을 기점으로 우리는 한일 관계는 물론 산업정책을 전면적으로 다시 바라봐야 한다. 국가간의 교역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경제적으로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구조라도 정치인들의 결정에 의해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그런 어리석은 결정이 일본은 물론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산업 대국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제품의 국산화 비율이 높다는 사실이 말이 좋지 쉬운 일도 아니고 항상 아름다운 일도 아니다. 불확실한 일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이며 그 시간 동안 관련 산업의 발전 전체를 더디게 한다. 첨단 산업의 발전이 정체된다면 인류 전체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 시장에서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일본의 공급 업체들이 사명감으로 개발한 기술을 은혜를 베푸는 마음으로 한국에 판 것이 아니다. 누군가 사가니까 돈을 들여 기술을 개발하고 설비를 갖추며 자신들 제품의 품질을 발전시켜 왔을텐데 교역이 시장논리가 아닌 이유로 정체되면 그 사이 경쟁자들만 따라갈 수 있는 시간을 번다.

     

    정부에서 특정 산업을 지원하는 일도 항상 옳다고 할 수 없다. 정부에서 추경을 편성하고 앞으로도 부품소재 산업을 지원한다면 결국 사회적으로 다른 분야에 쓸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하는 지원이다. 그렇지만 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이런 중요한 투자를 놔두고 평창올릭픽 같은 일회성 행사에 수조를 쓴 사실이 안타깝다. 화학제품에 대한 규제도 분명 환경을 고려해서 정해 놓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유지할 명분이 없다.

     

    시간을 2007년으로 다시 돌려보면 당시에는 한중일 삼국이 EU 와 같이 단일 통화를 쓰는 경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수업 시간에도 나왔고 세미나를 가도 나오는 이야기이며 신문 칼럼으로도 자주 나오던 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정치체제, 북한의 존재, 그리고 역사로 인한 사람들의 감정을 고려한다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계산기를 두드려 봤을 때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면 결코 말이 안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EU 역시 출발은 다시는 유럽에 전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자는 공감대였지 않은가. 만약 그때 한일이 보다 더 긴밀하게 이어졌다면 이렇게 시대를 역행하는 결과는 막을 수 있었을까.

     

    ‘대일 무역적자가 정말 나쁘기만 한가’ 라는 질문으로 돌아간다면, 과거에 어느 시점에서는 나는 나쁘지 않다는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제는 전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한국이 세계 시장에 잘 팔 수 있는 제품들이 줄어드는 가운데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산업의 일본 의존도가 높다는 사실은 약점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이 모든 상황이 전적으로 한국에게만 나쁜 결과가 아니라 한일간의 교역에서 이익을 봐온 일본에게도 역시 불행한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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