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A Short Film About Love, 1988)
<20200613 서울극장>
평생가도 이름을 절대 기억 못할것 같은 폴란드 출신의 거장 크쥐시포트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본국 폴란드에서 만든 영화. 감독님은 프랑스에서 만드신 삼색 연작 시리즈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로 국내에서도 유명하신 분. 그 이전에 폴란드에서 성경의 십계명을 주제로 한 10부작 TV 시리즈로도 세계적 명성을 얻었는데, 놀랍게도 EBS 에서 토요일 밤에 편성된 프로그램인 세계의 명화에서 10부작 전체를 방송한적이 있다! 90년대 후반인가 2000년대 초반의 언젠가로 기억하고, 박찬욱 감독이 앞서서 영화 소개 코멘트를 해주던 시절의 이야기.
(참고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의 영어제목은 The double life of Veronique 로 우리말로 하면 '베로니카의 두개의 삶' 이 적당할듯 한데 어찌되어서인지 저런 애로영화 같은 번역 제목이 붙어 버렸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이라는 어구는 영화 제목으로 인식하기 전 부터 익숙한 표현이었다. 이유를 찾아봤더니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멜로 영화를 묶어놓은 섹션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이다. (때마침 올해 미쟝센 단편영화제가 온라인으로 곧 시작한다! http://msff.or.kr/) 그렇게 사람들 기억속에서 가물가물한 이 클래식 영화를 상영관에서 만나게된 계기는 최근 전염병 영향으로 개봉 영화가 줄다보니 극장들이 옛날 영화 재개봉 행렬에 나서기 시작했고, 서울극장에서는 아예 거장들의 클래식 명작들을 상영하는 기획전을 하면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서울극장은 전염병 아니어도 영화관으로 경쟁력이 떨어져서 이렇게 틈새 시장을 계속 공략하는게 살아남는 전략일듯.
영화를 보면서 가장 처음든 생각은 영화가 지루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영화 내내 긴장감이 넘치고 몰입감이 대단했다. 그러면서 새삼 확인한 사실이 거장이라 불리는 영화 감독들은 영화에서 어떤 의미와 메시지를 담기 이전에 영화를 재미있게 연출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 한정된 장소와 적은 숫자의 배우들만 출연하면서도 촬영과 편집이라는 영화의 기본적인 요소만으로도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의외였던 사실은 영화 배경이 공산주의 치하의 80년대 폴란드인데 생각보다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올림픽을 개최했던 우리나라보다도 잘 살았던것 같은. (물론 이건 평균을 어디에 잡는가의 문제겠지?)
영화 속에서 말하는 '사랑' 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사람들 각자가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와 같이 다가왔다. 잘 알지도 못하고서 망원경으로 훔쳐만 보던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사랑의 감정에 못이겨 자살 시도를 하는 남자나, 자기를 집착하던 남자에게서 갑자기 연민을 느끼는 여자나 .... 이 모든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가 '사랑' 이라는 감정이라니. 내게는 감독의 사랑에 대한 태도가 다소 냉소적으로 느껴졌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본 영화인데 .... 생각해보니 요즘 세상에서는 나올 수 없는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남자의 행동은 분명히 성범죄에 해당하는 행위이고, 현재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그런 행동을 결코 사랑이라고 포장할 수도 없고 창작물에서도 다룰 수 없다. 세상이 과거보다 자유로워지고 있지만 동시에 여러 문제들에 대해 보다 민감해지면서 창작물에도 적용되는 제한이 늘어나는 것도 사실. 창작물에서 담을 수 있는 표현의 자유는 어디일까? 는 분명 생각해볼 문제이다.